Sapiens, the long context
AI 에이전트 시대에 사람은 결국 무엇을 하게 될까. 만드는 일은 점점 AI가 가져가고, 그 속도가 눈에 보일 정도로 빨라지고 있다. 그러면 사람한테는 뭐가 남나. 그 힌트를 인류의 먼 과거를 다룬 책 『사피엔스』 에서 얻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사람은 컨텍스트가 너무 크다
사람과 지금의 LLM 사이에서 제일 크게 벌어지는 건 컨텍스트다. 사람은 컨텍스트가 말도 안 되게 방대하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보고 듣고 만진 모든 것, 그 위에서 내린 크고 작은 판단들이 한 사람 안에 통째로 깔려 있다.
그런데 사람도 그걸 한 번에 다 펼쳐놓고 살진 않는다. 지금 집중하는 것에만 단기기억과 주의를 쓰고(RAM 처럼), 나머지는 장기기억에 넣어뒀다 필요할 때 꺼낸다. 사실 이건 지금 AI 가 하는 것과 구조가 크게 다르지 않다. 모델도 당장 다루는 건 컨텍스트 윈도우에 올리고, 나머지는 RAG 로 바깥에 쌓아뒀다 그때그때 꺼내 붙인다. 작업 메모리에 장기 보관함을 붙여 쓰는 뼈대는 사람이나 AI 나 비슷하다.
그래서 차이는 윈도우 크기에 있지 않다. 순수 컨텍스트 윈도우가 일생을 통째로 담을 만큼 커지는 건 사람을 따라잡는 게 아니라 오히려 뛰어넘는 일이다. 진짜 차이는 장기 보관함 쪽에 있다. 사람의 장기기억은 한 생을 끊김 없이 통과하며, 글자만이 아니라 모든 감각으로 들어온 것이 통째로 엮여 있고, 필요할 때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지금의 RAG 는 그에 비하면 거칠게 갖다 붙인 외장 메모리에 가깝다. RAG 를 넘어서, 한 생을 일관되게 통과한 컨텍스트가 그렇게 통합되고 떠오르는 메커니즘이 나온다면, 그때가 진짜 AGI 라고 부를 만한 지점일 것이다. 지금은 그 근처를 흉내 내고 있는 단계다.
그 방향과 별개로, 이미 분명해진 게 하나 있다. 사람의 지적 능력 자체를 도구로 쓰는 일은 이제 AI 가 더 잘한다. 주어진 문제를 푸는 것, 정보를 정리하고 분석하고 답을 내는 것, 그 자체로는 사람이 비교우위를 갖기 어렵다. 그냥 문제를 푸는 일은 끝났다.
결국 언어다
그럼 뭐가 남나. 여기서 『사피엔스』가 겹쳐졌다.
결국 이 세상, 인간사는 허구를 만드는 능력, '언어'로 발전한 것이다. 이게 『사피엔스』가 강조하는 내용이다. 유발 하라리는 7만 년 전 인지 혁명에서 사람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언어로 지어내고, 그걸 여럿이 함께 믿게 만드는 능력을 얻었다고 말한다. 핵심은 '생성'이다. 신, 국가, 돈, 회사, 인권. 전부 실체가 없는데 언어로 생성해낸 이야기들이고, 수많은 낯선 사람이 같은 이야기를 믿는 순간 대규모 협력이 일어난다. 사람이 지구를 차지한 건 더 똑똑하거나 힘이 세서가 아니라, 이야기를 생성하고 공유할 줄 알았기 때문이라는 것.
이야기를 생성하고 꺼내놓을 줄 아는 것이야말로 사람에게 주어진 가장 강력한 능력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을 하고 미션을 수행하는 객체로 존재하라고 주어진 능력이 아니다. 나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그것을 팔로우하는 다른 객체를 만들어내는 것. 그게 경쟁력이 되고, 다른 누군가 쉽게 따라 할 수 없는 역량이 된다.
사피엔스가 못 본 고리
재밌는 건 『사피엔스』의 마지막 파트다. 하라리는 책 끝에서 사람이 자연선택을 넘어 '지적 설계'의 시대로 간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 통로로 세 가지를 꼽는다.
- 생명공학, 사이보그, 그리고 비유기적 생명.
지금의 AI 는 굳이 따지면 세 번째, 비유기적 생명 쪽에 걸친다. 그런데 하라리가 비유기적 생명을 말할 때 떠올린 건 스스로 진화하는 프로그램이나 컴퓨터 바이러스 같은 것이었지, 그게 다름 아닌 '언어를 생성'하는 데서 출발할 거라는 데까지는 가지 못했다. LLM 은 그냥 다음 단어를 뱉는, 텍스트를 생성하는 모델로 시작했는데, 그 언어 생성 위에서 도구를 부리고 행동까지 하는 에이전트가 자라났다. 인지 혁명에서 사람을 사람으로 만든 바로 그 능력, 언어로 무언가를 생성하는 능력이, 이번엔 지적 설계 그 자체를 만들어내는 재료가 된 것이다.
유발 하라리는 책의 시작(인지 혁명, 언어 생성)과 책의 끝(지적 설계)을 『사피엔스』에서는 같은 선으로 잇지 못했다. 시작점의 능력이 끝점을 만들어낸다는 것. 이게 하나의 고리다.
한 가지는 짚고 가야겠다. 하라리도 결국엔 이걸 봤다. 『사피엔스』 한참 뒤, ChatGPT 가 나오고 쓴 『넥서스』에서 그는 AI 가 언어를 정복했고, 그래서 인류 문명의 운영체제를 해킹할 수 있게 됐다고 말한다. 다만 거기서 AI 는 우리 이야기를 빼앗아가는 위협이자 낯선 경쟁자로 그려진다.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결이 좀 다르다. AI 는 바깥에서 온 낯선 존재가 아니라, 인지 혁명에서 출발한 그 능력이 한 바퀴 돌아 만들어낸 결과물이라는 것. 그러니 진짜 물어야 할 건, 그 결과물이 아직 갖지 못한 게 뭐냐는 거다.
아직은 텍스트를 생성할 뿐
하지만 여기서 한 번 더 접어야 한다. 지금의 AI 는 아직 '텍스트를 생성하는 것'에 머물러 있다. 앞에서 말한 컨텍스트 얘기로 돌아오면, AI 에게는 아직 일생을 관통하는 컨텍스트가 없다. 한 생을 일관되게 통과하며 쌓인 배경, 그 위에서 나온 자기만의 스토리가 없다.
사람은 그 롱 컨텍스트에서 이야기를 생성한다. AI 는 아직 못 한다. 만약 AI 가 사람처럼 일생을 관통하는 컨텍스트를 들고, 그 위에서 자기 스토리를 생성할 수 있게 된다면, 그때는 정말 AGI 라고 불러도 될 것이다. 지금은 거기서 사람과 AI 가 갈린다. 그래서 사람이 할 일이 아직 그 자리에 남아 있다.
그래서 지금은 발산이다
그 남은 자리가 뭐냐면, 결국 발산이다. 개인이든 조직이든 자기만의 언어와 스토리와 컨텍스트를 생성하고, 그걸 unique 하게, 거의 밈처럼 퍼뜨려서 팔로우와 웨이브를 만들어내는 일. 단순하게 말하면, 인플루언서나 연예인, 유명한 연사들이 오히려 지금 가장 좋은 플레이를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사람만이 가진 롱 컨텍스트에서 나온 언어로 따르는 사람을 만들어내고 있으니까.
이건 내가 요즘 계속 부딪히는 지점이기도 하다. 구걸 얘기를 하면서도 결국 같은 자리로 갔다. 문제를 푸는 건 이제 어렵지 않고, 진짜 어려운 건 그걸 들고 나가서 발산하는 거라고.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자기만의 독특한 생태계와 흐름을 구축하고, 그걸 세상에 꺼낼 줄 알아야 한다. 사실 이 블로그 자체가 그걸 해보겠다는 시도다.
무엇을 하든, 이제는 사람만이 만들 수 있는 롱 컨텍스트의 언어로 따르는 흐름을 만들어내야 하는 시대다. 인지 혁명에서 시작된 언어 생성이 지적 설계를 만들어냈고, 그 지적 설계가 아직 갖지 못한 롱 컨텍스트가 다시 사람의 자리로 남는다.